사랑, 없는 것은 줄 수 없다
사랑, 없는 것은 줄 수 없다
  • 강병균 교수
  • 승인 2014.06.23 16:36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4.

사람들은, 특히 종교인들은 쉽게도 말합니다. 우리 사랑하자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은 절대로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지지 않은 돈을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수재의연금(水災義捐金)으로 낼 수도 없읍니다. 추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없는 수학지식이나 영어지식을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정치, 체육, 무술, 사업, 공예, 예술, 작문(作文) 등에 필요한 기술 역시 그렇습니다. 남을 가르치려면 먼저 배워 심신(心身)을 지식과 기술로 채워야합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사랑을 주기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차야 합니다. 여유가 많을수록 많이 줄 수 있습니다. 풍족하지 않은 살림에도 어려운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풍족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마음이 느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남에게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는 금언(金言)이 있습니다. 간혹 기이하게도, 사랑을 받아놓고도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준 것은 한 사발 물도 기억하지만, 받은 것은 억만금이라도 곧잘 잊읍니다. 이런 경우는 회귀명상법을 이용해서 과거의 사랑받은 경험을 회상해 내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많은 경우에, ‘준 것보다 덜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받은 것은 적게, 준 것은 크게 인식’하는 인지부조화일 가능성이 큽니다. 회귀명상법과 있는 그대로 보는 관법수행을 통해서 그 부조화를 교정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받은 사랑이 없다고 해도, 다음의 사랑은 누구나 받은 사랑입니다. 누구나 열 달 동안 따뜻한 양수의 바다에서 아무런 노동의 수고없이 탯줄이라는 보급선을 따라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아가며, 가지가지 모양을 나타내면서 종의 계통을 되풀이하는 35억년 진화의 세월을 기념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얼마나 복된 나날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므로, 옛 사진첩을 들여다보듯이, 좋은 일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반복해서 자꾸자꾸 기억해내야 합니다.

성체(成體)가 되기까지 살아남으려면 누군가의 사랑(보살핌)이 특히 어머니의 사랑이 절대적이므로, 누구나 사랑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간혹 혹독한 운명의 장난으로 그런 경험이 빗겨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위해서는 따로 방법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종교인이라면 자신의 삶을 바꾼 가르침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현명한 결정을 내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고스럽게 그런 가르침을 세상에 남긴 교조(敎祖)는 분명 후세(後世) 제자들을 미리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문하는 순간, 미리 주신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너무 추상적이고 마음에 와 닫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생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분명 놀랄 만큼 바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에서 넓은 마음과 이타적으로 바뀐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인간은 끝없이 진화하고 성장하고 변하는 존재이므로 윗방향으로의 변화가 중요할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성장했다면 그것이 축복이고 복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행복감은 우리 마음을 채우고 흘러넘쳐 주변을 채우고 그리고 남들까지 채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리저리 아무리 찾아봐도 행복한 일이 없으면, 지금부터 만들면 됩니다. 황금률(黃金律)에 따라 살면 됩니다. 그 가르침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인의 첫 번째 목표는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행복은 삶에 대한 사랑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세 가지 진리인 삼법인(무상 고 무아) 중 첫 번째가 무상(無常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입니다. 무상은 어마어마한 진리입니다. 흔히 무상이 고(苦)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에 ‘인생은 무상하다, 혹은 덧없다’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깁니다. 좋아하는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지 않아 (그 상태에 대한 집착으로) 고가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젊음, 애정, 건강, 지위, 명성, 기후, 지력, 기분, 감정이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변합니다.

하지만 무상은 동시에 ‘고로부터의 해탈’의 근원입니다. 만약 고가 무상하지 않다면 즉 변하지 않는다면, 고(를 불러오는 대상과 고 그 자체)는 영원히 괴로움으로 고착(固着)될 것이므로, 우리는 한번 고통에 빠지면 절대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고통도 시간이 지나가면 그 힘을 잃고 맙니다. 세상영화(榮華)만 시간을 못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무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고통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인 미움도 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움은 부처님이 설하신 4대 고 중의 하나입니다: 미운 사람을 만나거나 같이 살아야하는 원증회고(怨憎會苦)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미움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습니다. 자비명상을 해보면 알게 됩니다. 원수를 자기 마음의 스크린에 그려놓고 껴안아줍니다. 한번 껴안기가 힘들지 일단 해보면 생각보다 힘들지 않습니다. 인간은 35억년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들을 피하게 하는 ‘회피와 경고’ 기능으로서의 (그런 대상에 대한) ‘미움 또는 혐오’라는 감정이 발달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계에 물이 너무 많으면 홍수요 너무 적으면 가뭄인 것처럼, 인간사도 지나치기 십상(十常)이라 우리 감정은 사랑이 너무 적어 증오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이 지나침을 치료하는 것이 자비명상입니다. 미움이 강도가 약해지고 사라지면서, 사랑이 깃들고 둥지를 틉니다. (처음부터 미움이 없으면 미움의 무상함을 깨달을 수도 없기에, 그래서 ‘마음이 무상함(心無常)’을 깨달을 수 없기에, 진실로 미움은 해탈로 가는 탈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인간의 생존을, 개별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유전자(생체유전자 및 문화유전자)의 발견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개별체의 미움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미움의 역할이 축소되어 자비명상이 더 수월해졌습니다. 과학(자연과학과 인문과학)문명의 발달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천수천안(千手千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점을 자각하면 자비명상은 한층 더 수월해 집니다. 작은 배에 사람이 가득 타면 한 사람만 몸부림을 쳐도 배가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우주공간을 떠도는 지구라는 소형 배도 (핵폭탄 등 가지가지 흉측한 무기를 소지한) 인간들로 가득차면서, 전복하지 않으려면 몸부림치지 말고 평화롭게 살아야만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업, 조직, 사회,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자각은 자비명상에 대한 토대를 굳건하게 해줍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인색하기 때문에, 스스로 사랑받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의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인연이 즉 타인과 물질과 환경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지를 배워 깨달음으로써, 타존재들의 도움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 주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만든 물건이 얼마나 되는지. 우리가 누리는 물질문명은 거의 다 우리 손이 가지 않은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신발, 양말, 옷, 비누, 화장지, 치실, 칫솔, 이쑤시개, 가구, 집 등의 생활필수품, 전기밥솥, 냉장고, 세탁기, 식기세척기, 에어컨, 텔레비전, 전화기, 스마트 폰, 컴퓨터, 사진기, 라디오, 전축, 내비게이션 등의 가전제품과 전기전자기구, 연필, 볼펜, 만년필, 종이 등의 필기도구, 그릇, 칼, 숟가락, 젓가락, 솥, 냄비 등의 주방기기, 자전거, 자동차, 비행기, 배 등의 운송수단, 쌀, 보리, 밀 등의 곡물, 오렌지, 사과, 수박, 자두, 살구, 배 등의 과일, 습진약 ,활명수, 아스피린, 타이레놀, 무좀약 등의 의약품, 손톱깎이, 족집게, 화장품 등의 미용 용품, 음악, 연극, 드라마, 영화, 책 등의 문화상품, 포장도로, 철도, 항구, 공항, 송신탑, 전봇대, 상수도, 하수도 등의 사회간접자본 등등, 거의 모든 것이 남들이 만들고 생산한 것입니다(이 중에 필자가 만든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설사 (자기가 생각하기에) 즐겁지 않은 일만 일어나는 인생일지라도 방법이 있습니다. 누구나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므로 ‘이 괴로운 세상이 머지않아 끝난다’는 사실 그 자체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고(苦)라면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존재들에게까지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소위, 인식의 전환입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로서 설법제일인 부루나 존자는 고향으로 돌아가 전법(傳法)을 하고자 했습니다. 부처님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걱정스럽게 묻습니다. “네 고향사람들은 사납기로 악명이 높다는데, 그들이 너를 죽이려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루나가 대답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괴로움을 못 이기고 남들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는데, 그들이 자진해서 저를 죽여준다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부처님은 허락을 하고 부르나 존자는 전법을 떠나지만, 부처님이 염려하신대로 부루나 존자는 순교를 합니다, 그것도 단 일 년 만에. 하지만, 이 일화 어디에도 삶과 운명에 대한 저주나 불평이 없습니다. 따뜻한 사랑이 넘칠 뿐입니다.

절대로, ‘가지지 않은 것’은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지지 않은 것은 노력해서 얻고, 이미 가진 것은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사랑부자가 되고, 남에게 베풀어도 모자라지 않는 넉넉한 사람이 됩니다.

혹자는 묻습니다. “금강경에 따르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생멸을 하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인 것은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고 또 이슬방울이나 부싯돌불 같다)’이라는데, 사랑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인생이 몽(夢)이건 환(幻)이건 괴롭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부처님의 설산고행 6년도 필요 없었을 것이며, 45년 전법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몽(夢)과 환(幻) 속의 사람에게 고(苦)는 고일 뿐입니다. 그 고를 벗어날 때까지는 싯다르타처럼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회를 믿으시나요? 2014-09-11 16:50:41
정말 좋은 내용의 글입니다.
삶의 철학으로 배우고, 삶의 실천으로 가져갈만한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굉장히 송구스럽습니다만 허나 거기까지만입니다. 이 곳이 불교의 담론-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래와 같은 문단의 내용들은 강교수님의 개인적인 사유가 매우 훌륭하긴 하지만, 결코 불-교의 사유와 개인적 사유를 혼용하여 이해시키려 하시거나 강권하시는 것을 멈추었으면 하는 바램을 일으키는 글입니다.

<죽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감사할 수 있다> ~ 강교수님의 불교적 전제 속에 무상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윤회”는 누락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문단에서의 <순교>라는 단어도 무-윤회의 유일신-릴리전 계통에서 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순교-사망-끝. 그냥 죽었다 이든지 아니면 한국 불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로는 <입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문단을 연결하여서 느껴지는 뉘앙스에 바탕할 때 강교수님은 결코 “윤회”를 경전 근거적으로 표방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 마지막으로, 설사 (자기가 생각하기에) 즐겁지 않은 일만 일어나는 인생일지라도 방법이 있습니다. 누구나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므로 <‘이 괴로운 세상이 머지않아 끝난다’는 사실 그 자체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고(苦)라면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존재들에게까지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소위, 인식의 전환입니다.

# 부처님의 십대제자로서 설법제일인 부루나 존자는 고향으로 돌아가 전법(傳法)을 하고자 했습니다. ~~ 부처님은 허락을 하고 부르나 존자는 전법을 떠나지만, 부처님이 염려하신 대로 부루나 존자는 <순교>를 합니다, 그것도 단 일 년 만에. 하지만, 이 일화 어디에도 삶과 운명에 대한 저주나 불평이 없습니다. 따뜻한 사랑이 넘칠 뿐입니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 추정해 봅니다. 맞나요?

혜의 2014-06-25 23:31:39
주위의 고마운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인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