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에 그 존재 가치를 알리는 동시에 이웃과 사회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조직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종단을 이끄는 승려들의 한계성과 문제의식의 부재로 인해 불교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
1994년 서의현 총무원장 3선 문제로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우여곡절 끝에 중앙종회가 전권을 개혁회의에 이양하고 총무원장 선거로 월주 스님이 제28대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당시 본납은 개혁회의 주요관계자들에게 특별히 두 가지를 주문했다. 사찰 재정 투명화에 대한 제도혁신과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과 같은 ‘한국불교중앙연구원’을 설립해서 한국불교전반에 관한 문제를 심도 있게 연구, 발전시켜 나가자고 제안했다 .
그러나 법명만 대면 다 알 수 있는 현 종단의 지도급인사들은 외면했다. 당시 제안한 사업을 계획수립해서 시행했다면 종단의 위상은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근래 숭례문과 석굴암이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미세균열이 발생하는 것은 이해한다. 문제는 이러한 균열이 스님들에 의해 발견되고 문제 제기되어서 정부로 하여금 보호 대책을 수립토록해야 함에도 사회의 언론사에 의해 제기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동안 석굴암에 대해 몇 편의 글에서 언급한 바, 전문 연구기구의 설립과 주변에 미세진동이라도 발생하는 일체의 인위적인 시설의 금지와 참배객의 철저한 제한이다. 무엇보다 현 보호 장치와 변형된 구조에 대해 지속적인 연구가 현장 중심으로 진행돼야 I할 것이다. 참배객은 예약제로 해서 최소한의 인원에 한하여 공개해야 한다. 그것도 전문적인 판단에 의해서 말이다. 담당자를 두어서 일일점검을 통해 상세한 점검 및 기록을 해나가야 한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듣더라도 조계종은 숭례문의 복원에 일정부분 의견을 제시했어야 했다. 숭례문 건설은 태조 5년에 시작되어 2년 후 태조 7년 2월에 완공되었다. 숭례문 건립 당시의 대목장이 법륜사의 각희(覺希) 스님이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공사 현장을 총체적으로 지휘 감독하는 이가 바로 스님이었다. 스님이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불교계에 제대로 된 연구소가 있거나, 종단이 관심을 보였다면 숭례문 복원에 대해 불교계가 수준 높은 의견서를 제안해서 여법한 복원에 기여를 했을 것이다. 소납은 2012년 3월 7일 <불교닷컴>기고문 ‘남대문 상량문 왜 단기 아닌 서기를? - 단기나 육십갑자 표기가 전통적 방식이다’를 통해 숭례문의 상량문의 서기연호의 표기를 지적했다.
우리는 과거시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일제강점기엔 일본의 연호를 따라가다 미 군정시절에는 서력기원을 쓰고, 1961년 12월 당시 박정희 정권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서력기원을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로 한다’는 법률을 발표했다. 일상에서는 세계 공용연호를 사용 한다 해도 복원문화재의 상량문에서까지 서기연호를 사용한다면 역사와 문화재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
숭례문은 건물 자체의 복원은 물론 정신적인 면에서도 부실이며, 날림공사였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살피건대 숭례문의 단청을 모두 제거하고 재시공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바, 이참에 상량문도 재작성하기를 바란다.
숭유억불의 시대 조정이 스님들을 마음대로 동원하고 착취해서 건설한 숭례문이다. 핍박 속에서도 묵묵히 기술과 솜씨를 발휘했을 각희 스님 등 당시의 스님들을 생각해서라도 숭례문 복원에 종단이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건의해야 한다.
석굴암에 대해서도 정부의 대처만 기대하거나, 당장은 붕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주변의 진동 요인를 즉각 차단하는 동시에 전문성과 책임 있는 기구를 구성하여 심도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전문가와 언론사에 현장부터 공개할 필요가 있다. 종헌기구의 수장들은 그 자리에 대한 책임이 막중함을 알아야 한다.
/法應(불교사회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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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는 쇠귀에 경읽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