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총무원장의 역할/박병기 교수
[전문]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총무원장의 역할/박병기 교수
  • 서현욱 기자
  • 승인 2013.07.30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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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정체성과 총무원장의 역할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교수)

1. 무엇이 문제의 핵심인가?

한국불교(계)가 표류하고 있다. 21세기 한국사회가 외적인 성장이라는 외피 속에서 정신적 방황을 계속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불교계는 종교로서의 청정성은 물론 최소한의 세속 윤리마저 지니지 못한 채 세간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듯한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갈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는 느낌을 줄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승가와 재가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유독 승가에서 그런 느낌이 강렬한 것은 승가공동체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수행에 근거한 청정성’을 찾기가 매우 어려워진 현실 때문일 것이다.

우바새, 우바이로 상징되는 재가공동체의 경우는 어떤가? 재가의 경우는 대체로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이른바 기복불교로 대변되는 비불교적 행태를 일상시하는 불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 수행과 마음공부에 주로 관심을 가지면서 승가와는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격리된 불자들'이다. 이 두 부류는 모두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 긍정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 어긋나는 ’비불교적 신행‘이기 때문이고, 후자의 경우도 사부대중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공동체적 속성에 애써 눈을 감는 이른바 ’소승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모임은 그 두 가지 부정적인 모습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하면 한국불교가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로 마련되었고, 특히 그 중심 주제를 당면한 과제인 ‘대한불교조계종 34대 총무원장 선거’로 삼아 생각을 공유하는 자리이다. 이 어렵고 중요한 자리에서 발제자라는 무거운 역할을 감당해주신 윤세원교수님(이하 발제자로 칭함)께 감사의 말씀을 먼저 전해드리고 싶다. 이미 발제자의 발제를 통해서도 충분히 드러난 것처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조계종이라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함께 그 정체성을 구현할 것으로 기대되는 총무원장의 자격과 역할 문제이다.

발제자는 총무원장의 기본 요건으로 엄격한 지계와 지속적인 수행, 자비실천 등 세 가지를 들고 있고, 이 최소한의 요건에 대해 이의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건은 총무원장의 요건이 아니라 모든 수행자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것들일 뿐이다. 발제자는 그 수행자의 대표가 총무원장이라는 전제 속에서 조계종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계의 문제들, 즉 문중과 종책 모임을 근간으로 하는 패거리 짓기와 금권 선거를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싼 부정적인 문제들로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인 논조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하면서도 본 토론자는 ‘총무원장’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논의가 사부대중공동체라는 바탕 위에서 좀 더 심화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총무원장 선거 자체라기보다는 그 선거를 움직이고 있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자본주의 사회와의 접점 모색의 실패라고 판단된다. 한국불교가 이른바 통불교라는 지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계율의 차원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상좌불교공동체를 전제로 해서 성립된「사분율」과 대승불교권의「범망경보살계」로 상징되는 보살계를 모두 수지하는 계율 전통을 갖게 된 한국불교는 그 둘 중의 어느 것에도 충실하지 못하는 흩어진 계율관을 보여주고 있고, 토론자가 보기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 중 하나는 바로 이 계율관의 혼돈이다.

2. 사부대중공동체의 확립 과제와 총무원장의 위상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인가?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라한을 이상적인 지향으로 내세우는 남방불교권과 비교해서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북방불교권이 속하기 때문이고, 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계율에 있어서도 보살계 중심의 불교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대승불교는 기본적으로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선남자여, 여래가 설하는 보살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집에 있는 이요, 둘째는 출가한 이다. 출가한 보살을 비구라 하고, 집에 있는 보살은 우바새라 한다. 출가한 보살이 출가의 계율을 가지기는 어렵지 않지만, 집에 있는 보살이 재가계(在家戒)를 가지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집에 있는 사람은 나쁜 인연에 얽매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우바새계경』「수계품」, 강조는 토론자의 것임.)

한국불교의 보살에는 이러한 비구와 우바새는 물론 비구니와 우바이를 합한 네 가지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이러한 네 유형의 보살이 한 몸을 이루는 사부대중공동체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 종단이자, 최소한 외적으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불교를 대표할 만한 종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조계종이 실제로도 사부대중공동체를 전제로 해서 운영되고 있는 종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조계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비구승들일 뿐이다. 얼마 전 중앙종회의 호계위원 선정과정에서도 충분히 보여준 것처럼, 출가보살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비구니스님들은 그 숫자나 공부 및 수행의 정도에 비해 거의 존재감을 찾아보기 어렵고 우바새와 우바이라는 재가보살들의 위상은 그 보다도 더 낮고 비천하다. 재가보살들은 대체로 비구로 상징되는 일부 출가보살들에게 종속되어 있거나, 아니면 독자적인 수행의 길을 걸어가는 ‘고립된 불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사부대중공동체의 명맥을 유지하게 하는 것은 오늘 토론회를 주관하는 ‘사부대중연대회의’ 정도이다.

물론 비구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해서 그 비구의 범주에 철저히 수행의 길을 가는 수행승들이 온전히 포함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종권의 핵심을 차지하는 일부 권승(權僧)들의 독점과 횡포 속에서 수좌로 상징되는 수행승들의 위상과 처지는 날로 악화되고 있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한국불교계의 처절한 현실이다. 주지를 돈으로 사고판다는 풍문들이나 도박이 일상화되어 있어 그것을 왜 문제삼느냐고 반박하는 어이없는 반응이 그러한 현실을 보여주는 일부의 사례들일 뿐임을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한국불교의 가장 크고 중요한 과제는 그러한 독점구조를 타파하여 본래의 사부대중공동체를 재정립하는 일이다. 이 과제는 재가보살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출가정신을 지키면서 수행의 길을 꾸준히 가고 있는 상당수의 출가보살들의 수행환경 조성을 위해서 더 필요한 일이다. 그 맥락 안에서 총무원장 선거나 본사 주지선거 문제를 바라보아야만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제도 개선 정도의 논의에 초점을 맞출 경우 지금까지 해왔던 공허한 담론의 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사부대중공동체의 전제 위에서 조계종 총무원장의 위상과 역할은 포다 포괄적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우선 총무원장은 사부대중공동체를 대표하는 자리여야 하고, 따라서 그 선출과 추대의 과정에서 당연히 사부대중공동체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총무원장이 될 수 있는 피선거권의 경우에, 경전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나쁜 인연에 물들 가능성이 낮은 출가보살’로 제한할 수 있지만 이때에도 당연히 비구스님에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비구니스님까지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재가보살에게도 선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포괄적인 의미의 선거권을 보장해 주어야만 한다.

이렇게 선거권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선출과정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 선거권자를 대폭 확대하여 모든 사부대중공동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직선제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이른바 ‘교황 추대식’ 방법을 채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유념해야 하는 점은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종교적 성격의 차이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을 숭배하는 타력종교로서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추기경들만이 참여하는 교황추대가 정당화 근거를 지니는 반면에, 불교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석가모니 붓다를 절대자로 숭배하는 신앙의 종교가 아니라 내 안의 붓다를 알아차리는 수행의 종교라는 점에서 그 주체인 보살이 모두 참여할 수 있고 또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도출된다.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차이는 깨달음 자체의 차이가 아니가 수행과정에서 요구되는 ‘좋은 인연’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의 차이일 뿐임이 대승경전은 물론『유마경』과 같은 초기경전에서도 충분히 강조되고 있다. 재가보살들은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나쁜 인연’과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경전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것이 곧 깨달음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분명히 인식하면서 출가보살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안고 있다.

조계종단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계의 심각한 문제는 이 지점에서도 부각된다. 즉 ‘나쁜 인연’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다는 재가보살보다도 더 심각한 ‘나쁜 인연’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일부 출가보살이 금권과 패거리 문화를 이용하여 총무원장에 당선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발제가가 강조한 지계와 수행, 자비행을 겸비한 출가보살들은 이 과정에서 아예 원천적으로 배제될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 우리 총무원장 선거과정이고, 이 과정을 직시하면서 근원적인 개혁을 모색하지 않으면 34대 총무원장 선거 또한 이전과 유사하거나 더 악화된 형태로 치러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3. 총무원장 선출 과정의 변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들은 어떤 것들인가? 오늘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실천적인 답변을 공동으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실천적인 답을 찾는 일은 물론 쉽지 않은 과제이다. 우선 선출 과정을 결정하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거나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현실이 우리를 절망감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선 그 권한을 가진 일부 권승들의 숫자가 많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태에 대해 비판적 또는 비관적 시선을 간직하고 있는 출가보살들의 숫자 또한 결코 적지 않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출가보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비구니스님들이 중심을 차지하지만, 비구스님들의 경우에도 그 숫자와 변화를 향한 열망에서 결코 약하지 않다.

다음으로 찾을 수 있는 희망의 결정적 근거는 그런 행태에 미래가 없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런 비불교적인 행태가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만의 착각과 무명(無明)의 그림자 속에서 통용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속담에 있는 ‘선생 벼슬과 중 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하다.’는 말은 스승과 스님들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라 스승과 스님의 본래 역할과 위상에서 벗어난 행태에 대한 비판일 뿐이다. 교육공동체나 사부대중공동체에도 분명히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와 그 역할이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 ‘벼슬’ 자체에만 집착할 경우 ‘닭벼슬’만도 못한 것에 집착하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기본 전제는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갖는 일이고, 특히 대승불교권에 속한 우리에게는 이판과 사판의 경계를 걸림 없이 넘나드는 무애(無碍)의 자세여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세와 수행력을 갖춘 분을 총무원장으로 모시는 일은 바로 그런 점에서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부대중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관심을 갖고 선출과정을 지켜보면서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가야만 한다. 총무원장은 사부대중공동체의 대표이지 비구승들의 대표만은 결코 아니라는 인식을 사부대중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는 이유이다.

그런 다음에는 총무원장 자격을 정하는 일과 선출과정을 정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총무원장은 먼저 대승불교적 의식을 갖고 있는 출가보살이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당연히 율의계(律儀戒)의 출가보살계를 수지하고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일정한 수행 경력이 객관적으로도 검증 가능해야 하며, 또 다른 측면에서는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현재 한국사회의 구조적 맥락과 역사적 맥락을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을 갖춘 분이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인 자격의 차원에서는 이러한 혜안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의 과정을 마친 분으로 규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선출과정이 반드시 직선제나 간선제 같은 선거의 과정일 필요는 없지만, 그 과정에 사부대중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보장되어야 한다.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우선 비구니 스님들의 비율이 획기적으로 늘어야만 하고, 재가보살들도 어떤 비율로든지 반드시 참여가 보장되어야만 한다. 출가공동체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현재는 그 자체로 불교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이지만, 그 ‘헌신’이 많은 돈과 시간적 여유 속에서 도박이나 일상적 소비 같은 행태에 집중할 수 있는 현실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보면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이 더 부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유일한 대안은 재가보살들의 위상과 역할 강화인지 모른다. 재가보살이 지니고 있는 ‘나쁜 인연’과 얽힐 가능성이라는 한계를 직시하면서 그 반대의 가능성이 높은 출가보살들의 위상을 충분히 존중해주면서도 그들이 처한 위험성에 대해서 충분히 경고하면서 본래의 길로 돌아올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일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34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선출 과정이 그런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힘을 모아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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