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소장은 “중화사 화재로 부처님이 소실됐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 돼야 하는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다음은 최 소장의 논문 ‘영동 중화사 목조불상과 조각승 연구’ 가운데 일부 발췌.
영동 중화사는 의상 대사가 창건한 후, 고려시대 보각국사가 중건하였다. 중화사는 정유재란(1597년) 기간 중 소실돼 전쟁이 끝나고 서산대사가 중창한 후, 대웅전은 17세기 후반부터 근대까지 중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영동 중화사 대웅전 목조불상은 개금작업을 하면서 조성발원문이 발견돼 시도지정문화재 조사를 계기로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졌다.
조성발원문에 의하면 1686년에 경상북도 상주시 백화산용문사(白華山龍門寺)에 봉안하기 위하여 석가삼존불과 관음보살 등을 화원 법림·영탄·학찬·천순·일옥·천오 등이 조성했다. 불상이 상주 용문사에서 영동 중화사로 언제 옮겨졌는지 알 수 있는 문헌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 지난 10일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된 영동 중화사 대웅전 불상(사진=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목조불상은....
중화사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은 본존을 중심으로 양 협시보살을 배치한 삼존불좌상이다. 본존과 왼쪽협시보살상은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이고, 오른쪽 지장보살상은 근래에 제작된 것이다.대웅전에 봉안된 목조불상은 2007년에 개금작업 중에 조성발원문이 발견됐다고 한다. 목조석가불좌상은 전체 높이가 135cm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중형 불상에 속하는 작품이다.
불상은 얼굴을 앞으로 약간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신체와 얼굴이 1:0.35 비율로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불상보다 신체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색난이 1684년에 만든 전남 강진 옥련사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신체비례와 착의법 등에 차이가 있다
앞으로 숙인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가 표현되고, 정상부에 좁고 높은 원통형 정상계주와 이마 위에 가늘고 좁은 반원형 중간계주가 있다. 계란형의 얼굴에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반쯤 뜬 눈,콧등이 평평한 삼각형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을 표현했다.
이러한 얼굴의 인상은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색난이나 단응 및 금문이 제작한 불상의 얼굴형과 이목구비 처리가 다르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고 바닥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바깥에 걸친 두꺼운 대의는 변형통견으로, 대의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짧게 걸친 후,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하반신에 펼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옷자락은 복부에서 한 가닥이 넓게 초생달처럼 펼쳐지고 끝단이 지그재그로 처리되고, 옆으로 낮게 깔린 옷주름이 네 가닥 펼쳐져있다.이와 같은 하반신의 옷자락 처리는 조각승 색난이나 승호가 제작한 불상과 많이 다르다.
대의 안쪽에는 편삼을 입지 않아 맨살이 드러나며, 불상이 편삼을 걸치지 않은 착의법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가불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착의법이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는 수평으로 접어 단순하게 처리했다. 대좌는 팔각대좌 위에 연화좌를 올려놓은 단순한 구조이다.목조보살좌상은 본존과 같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염보주로 장식된 커다란 보관 안쪽의 머리카락은 두 갈래로,나머지 머리카락은 보관 밑으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인상과 대의처리는 본존과 동일하지만, 손의 위치는 본존과 달리 왼손을 어깨까지 들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도박한 사실을 까발신 스님 처벌하기도 바쁘실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