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구제의 성자 교키(行基)보살
민중구제의 성자 교키(行基)보살
  • 김춘호
  • 승인 2013.04.1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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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8. 제7강
이번 강좌에서는 교키(行基, 668~749)라는 고대 일본의 한 승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날까지도 일본고대불교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승려이기도 하며, 종교적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할 승려로서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일생을 추적해 봄으로써 고대일본불교사의 중요한 한 흐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교키상, 킨테츠 나라역 앞. 사진출처:http://bittercup.blog81.fc2.com/blog-entry-2182.html

교키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는 《교키연보(行基年譜)》, 《교키묘지(行基墓誌)》 , 《교키보살행장회전(行基菩薩行狀繪傳)》, 《생구산죽림사연기(生駒山竹林寺緣起)》, 《속일본기(續日本記)》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들 자료를 통해 그의 행적을 재구성해 보기로 하자.

교키는 668년 가와치(河内)의 오오토리군(大鳥郡)에서 아버지 고시 사이치(高志才智)와 어머니 하치타 코니히메(蜂田古比売)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시(高志)씨는 가와치노 후미(西文, 혹은 후미(書)씨)의 분파로 백제계 도래인(渡來人)이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일본에 건너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으로도 유명한 왕인(王仁)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하치타 코니히메 역시 백제계 도래인 출신으로 선조들이 주로 조정의 의료방면에서 활약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후에 교키활동에 있어서 도래계 출신이라는 그의 출생배경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예를 들어 스승 도쇼(道昭)와도 같은 백제계 도래인이라는 배경이 있었으며, 교키활동의 지지자들 역시 도래계 출신이 많았다.

682년 교키는 15세의 나이로 출가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출가목적이나 계기 등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국가불교로서의 틀을 잡아가고 있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교키의 출가가 국가권력과 무관하게 사원 내에서 처리되었다던가, 개인적 차원에서 삭발하고 승려를 자칭하는 식은 아니었을 것은 분명하므로, 당시 천황이나 황후, 공주 등 황족의 치병을 목적으로 국가가 행한 집단 출가시에 함께 출가한 것으로 보여진다.

15세 출가이후 교키는 24세(691)에 고궁사(古宮寺) 덕광선사(德光禪師)로부터 구족계를 받는다. 수계 후 원흥사(元興寺)의 도쇼(道昭)에게 사사받았고 유가유식(瑜伽唯識) 등을 수학하는 한편 산림수행(山林修行)에도 힘쓴다. 원흥사 시절 교키는 도쇼의 민중구제 사업을 제자로서 직접 경험하였을 것임으로 후에 자신의 민중포교사업 역시 스승 도쇼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700년 교키의 나이 33세에 스승 도쇼가 입적하고, 어린 시절부터 계속하였던 산림수행(山林修行)을 마친 교키가 자신의 생가를 고쳐서 에바라지(家原寺)를 건립한 것은 그의 나이 37세(704)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그의 본격적인 민중구제와 포교활동이 시작된다.

▲ 에바라지(家原絲), 오사카후 사카아시(大阪府堺市) 그림출처 : http://ja.wikipedia.org/wiki/

《속일본기(續日本記)》749년 2월 기사에는 교키의 입적과 함께 그의 삶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2월 정유. 대승정 교키화상이 입적하였다. 화상은 야쿠시지(藥師寺)의 승려였다. 속성은 고시씨(高志氏)로 이즈미국(和泉国) 사람이었다.(중략) 도시와 주변을 돌며 중생을 교화하였다. 출가나 속가 모두 그를 존경하여 따르는 자가 수천 명이 넘었다. 어디를 가든 그가 왔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다투어 찾아와 예배하였다. (중략) 중요한 곳마다 다리를 놓고 제방을 쌓았다.(중략) 쇼무천황(聖武天皇, 재위:724-749)이 그를 깊이 존경하여 대승정(大僧正)의 지위를 하사하고 더불어 400명을 출가시켰다. 화상의 (행적에는) 신비로운(靈異神驗) 일이 많았으며, 사람들은 그를 교키보살(行基菩薩)이라고 불렀다. 머물렀던 곳마다 도량(道場)을 세웠으며 그것이 기내(畿內)에만 49곳이다.”

먼저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교키의 포교대상이 주로 도시와 그 주변의 민중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는 지난 강좌를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불교에 대한 옹호와 통제가 국가로부터 엄격히 행해지고 있었던 이른바 국가불교의 시대였다. 특히 승려개인의 도량의 건립과 민간포교 등은 승니령(僧尼令)에 의해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교키의 민간포교는 곧 엄연한 위법행위였던 것이다. 《속일본기》 양노원년(717) 4월 임진조에는 그러한 정부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실로 지금 소승 교키와 그 제자들은 무질서하게 모여 망언으로 죄와 복을 설하며 무리를 만들고 팔과 손가락을 태우고 벗긴다. 문을 나가서 거짓으로 설하고 강제로 남은 것을 얻으며 속여서 성도(聖道)라고 하며 백성들을 요혹(妖惑)한다. 도속을 어지럽히고 사민(四民)의 생업을 버리게 하니 나아가서는 석존의 가르침에 위반되며 물러서서는 법령을 범한 것이다.

앞서 본 749년의 기사와 비교해 보면, ‘교화(敎化)’와 ‘요혹(妖惑)’이라는 표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교키의 민간포교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180도 변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변화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 헤조쿄(平城京) 조영을 위해 여러 지방에서 동원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709년 헤조쿄 조영을 위한 칙령이 발포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다양한 징역과 조세의 차출이 강요되고 있었다. 교키가 교화의 대상으로서 손을 내민 이들이 바로 도시와 그 근교에 살고 있었던 이들 부역민들이었던 것이다. 이들 중에는 지나친 조세와 부역을 피해 도망쳐서 유랑민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정부로서도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던 교키의 활동을 용인해 줌으로써 그들이 가지는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 《교키연보(行基年譜)》의 49원.

아울러 교키의 활동이 717년 이후 수도 헤이조교(坪城京)을 벗어나 이즈미(和泉), 셋츠(摂津)등의 기내 각지로 옮겨진다는 점과 활동 내용 또한 반정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시설의 확충이나 보시소(布施屋), 사원건립 등의 민중구제 사업이었다는 점도 그들의 활동을 용인하게 된 주요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교키의 민간포교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탄압에서 인정으로 급선회한 시기가 731년이므로, 이 시기 이미 교키집단이 쉽게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즉 교키의 전기를 전하는 749년 《속일본기》기사 속에서도 드러나듯이 교키를 따르는 이들이 이미 수천이 넘고 그가 창건한 도량도 49개소에 달한다고 하고 있다. 또한 《行基年譜》의 <天平十三年辛巳記>에 의하면 741년까지 교키가 카와치(河内), 셋츠(摂津), 야마시로(山城) 등지에 축조하거나 수리한 연못이 15개소, 구(溝)가 6개소, 수로가 4개소, 도로가 1곳, 다리가 6개소, 포구가 2개소 보시소(布施屋)가 9개소라고 전하는데, 이러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과 노동력이 전제되는데 그만큼 교키의 사회적 위상이 높았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行基年譜》에 전하는 교키 창건의 49원을 정리해 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위의 표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은 실로 놀라운 민간포교의 업적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교키에 대한 당시 민중들의 신망은 두터운 것이었다. 그리고 교키가 743년 대불조영이라는 가장 중요한 국가사업의 권진(勸進)으로 발탁됨으로써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743년 쇼무천황(聖武天皇)은 대불조영이라는 중대 사업을 공포한다. 국가의 모든 동(銅)을 모아 녹여서라도 거대한 비로자나 금동불상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선언이었으며, 741년 국분사(國分寺)건립 명령 이후 가장 큰 국가의 불교 사업이었다. 그리고 대불조영 발표 4일 후인 743년 10월 19일, 이 사업의 기금조성 담당자(勸進)로서 교키가 임명된다.

원래 쇼무천황의 대불조영에 대한 계획은 740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와치의 치시키지(知識寺)를 방문한 쇼무천황이 그 곳에 모셔진 비로자불을 보고 큰 감명을 얻어 자신도 비로자나불을 만들겠다고 한 것이 대불조영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쇼무천황이 지식사의 불상을 보고 얻은 감명은 그 생김이나 규모 때문이 아니라 그 불상이 탄생한 배경에 있었다. 즉 지식사라는 사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곳의 불상은 수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희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다시 말하면 민중들의 결합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쇼무천황은 그러한 민중의 결합력에 감동한 것이며, 자신이 구상한 대불의 조영 역시 같은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교키야말로 민중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대 불사를 담당해 낼 적임자였던 것이다. 물론, 국가의 입장에서는 국분사 조영이나 헤조쿄(平城京) 천도 등의 국책사업의 진행으로 인한 재정적 압박과 같은 현실적인 이유도 교키를 대불조영의 권진으로 지목하게 된 중요한 이유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불조영의 권진으로 활약하던 745년 교키는 당시 국가불교에서 규정하는 승려의 최고지위였던 대승정(大僧正)에 오른다. 망언으로써 백성들을 요혹한다고 하여 국가로부터 활동을 탄압받았던 그가 승려로서 국가가 인정하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가장 중요한 국가불교사업의 중추로 활약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인 749년 2월 2일 교키는 키코우지(喜光寺)의 토난잉(東南院)에서 제자 코신(光信)에게 자신이 일군 사업들의 뒤를 맡기고 세수 82세로 입적한다.

▲ 교키묘, 나라켄 이코마시 치쿠린지(奈良県生駒市 竹林寺). 사진출처 : http://tempsera.at.webry.info/200805/article_70.html

교키는 소외받고 있었던 민중의 구제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인물로 평가 받는다. 국가불교의 시대를 살면서 국가와 제도권의 불교계로부터 탄압과 견제를 받으면서도(교기 만년에는 그의 활동이 국가로부터 공인받기는 하였음), 그는 소외되고 있었던 하층 민중들의 삶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교화하고, 민중들의 안정적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우물을 파고, 저수지나 수로를 만들며, 다리나 포구를 건설하였다. 그가 창건한 사원만 해도 49개소에 이르며, 연못(저수지)이 15개소, 구(溝)가 6개소, 수로가 4개소, 도로가 1곳, 다리가 6개소, 포구가 2개소, 보시소(布施屋, 부역민이나 민중 구휼을 위한 시설)가 9개소에 달한다.

물론 이러한 대사업은 교키 혼자의 힘이 아니라 이른바 ‘교키집단’이라고 불렸던 그의 제자들과 수많은 추종자들의 협력으로 가능한 것이지만, ‘교키보살’이라는 칭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키의 민중적 지지는 국가권력마저도 압도할 만큼 실로 큰 것이었으며, 그의 삶은 불교로부터의 수해가 국가나 일부 귀족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민중들의 삶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고대 일본인들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사로 불교문화를 가르친다. 전남 여수 출생. 원광대학교 동양종교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불교문화를 전공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일본불교사연구소, 사적과 미술(史迹と美術) 등 한·일 학계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 문화재나 유적, 불교신앙 등을 주된 연구테마로 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본의 역사」(2010, 역서), 「고대 한국과 일본과 일본의 불탑수용과 그 전개」(박사학위논문), 「아스카·나라시대 불탑의 전개에 대하여」, 「고대일본의 경전신앙」, 「고대 일본의 민간포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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