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조계종의 역사와 통합종단 출범의 의의(3)
[기고]조계종의 역사와 통합종단 출범의 의의(3)
  • 김상영 교수
  • 승인 2012.05.07 0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Ⅲ. 조계종의 성립과 발전-1. 조계종의 성립 시기와 종조 인식의 문제

Ⅲ. 조계종의 성립과 발전

1. 조계종의 성립 시기와 종조 인식의 문제

일제강점기 대학자였던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1918) 二百品題 가운데 하나로 <普照後始設曹溪宗>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였다. 그는 이 항목의 말머리에서 “고려 중세의 불일 보조는 배움에 전승받은 바 없이 스스로 선종을 창립하였다(自創禪宗)”고 하였다. 그는 또한 熙宗이 조계산수선사로 賜額한 사실을 언급한 후, “조계의 設宗이 처음 여기에서 나타났고, 그 후 진각국사가 조계산의 제2조 수선사주가 되었고(중략)..고려 중세 이후 선파는 무슨 종에서 나왔는가를 논할 것 없이 조계종이라 칭해지니, 선종이라는 말과 같다. 이것은 바로 불일 보조국사의 위덕 법화가 그렇게 한 것이다”고24) 하였다.

이능화와 비슷한 시기 《조계고승전》(1920)을 찬술한 錦溟 寶鼎(1861-1930)은 그 서문에서 “宗主 지눌이 선종 9산과 교종까지 아우르는 선교통합의 종으로 曹溪宗을 개창하였다”고 하였다. 보정은 지눌이 송광사 조계산의 조사이며 조선후기 三門의 종주라고 평가하고, 지눌의 ‘禪敎兼傳 定慧均修’의 유풍을 浮休宗, 즉 부휴계가 계승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보정은 조계종 정통론과 보조종조론을 적극 주창한 승려였다. 25)

이들의 관점, 즉 지눌이 조계종을 창종했다고 보는 관점은 이후 李在烈(1915-1981), 李鍾益(1912-1991) 26)등에 의해 더욱 확대 재생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이재열은 1942년 <祖道復古에 관한 성명서 및 그 이유서>를 발표하므로써 당시 종단 내에서 징계 문제가 거론되기도 하였다. 그는 《曹溪宗源流及傳燈史之根本的硏究》, 《曹溪宗傳燈譜竝開宗敎旨》27) 등의 저술을 통해 종조 문제 뿐만 아니라 법통에 있어서도 태고법통설을 부정하고 나섰지만, 각종 사료를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취약점을 보였다. 보조종조설은 이 시기 송광사 승려들에 의해 적극 주장되거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며28),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세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능화는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국학자이자 불교사학자였다. 보정 역시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긴 이 시대 대표적 학승이었으며, 이재열의 학문적 열정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한결같이 심각한 학문적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지눌은 선종을 창립한 적이 없으며, 더욱이 그에게서 조계종의 設宗이 처음 나타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학계 일각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시급히 시정되어야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보조종조설과 함께 태고종조설도 또 다른 학문적 오류의 사례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태고종조설의 대표적 주창자는 包光 金映遂(1884-1967)였다. 김영수는 실상사, 법주사 주지 등을 역임한 뒤 1918년부터 불교중앙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불교사 교과목을 강의하게 되었는데, 그의 본격적 불교사 연구는 이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선문 9산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를 발표하였던29) 그는 일찍부터 조계종으로의 종명 개정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근대 이후 불교계에서 시도되었던 원종, 임제종, 선교양종, 선종 등 다양한 종명의 특성과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후, “然이나 전에도 述함과 같이 종명이라 하는 것은 항상 타종과 혼동치 아니하기를 爲主함은 금일에 在하여 만일 선종이라 종명을 立하면 일본의 선종3파(임제 조동 황벽)라는 선종과 구별이 無한 우려가 有하므로 제일 적당한 종명을 取코져 할진대 반드시 조계종이라 하는 외에 更無하다 단언하노라”30)고 하였다. 김영수와 함께 退耕 權相老(1879-1965)도 조계종으로의 종명 개정을 주장하였으며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일제강점기 불교계는 결국 1941년 ‘대한불교조계종’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김영수는 1941년의 조계종 설립 과정에서 태고 보우를 종조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였고, 그 결과 <태고사법> 제4조에는 “본종은 태고보우국사를 종조로 함”이라는 내용이 수록될 수 있었다. 하지만 태고종조설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漢巖 스님은 <海東初祖에 對하야>라는 글을 통해 “太古가 中興祖라 함은 或 그럴는지 모르나 어떻게 初祖가 되리요”라고 하면서, 1929년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에서 채택된 종헌 내용을 비판한 바 있다.30) 또한 한동안 김영수와 유사한 종사관을 지녔던 권상로까지 조계종 출범 이후 종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서면서, 이후 수년간 조계종 종조 논쟁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권상로는 ‘도의종조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도의-보우에 이르는 전법 계통이 담겨있는 신자료32)를 소개하면서, 조계종 종조는 도의가 되어야한다는 입장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하였다. 태고종조론은 보조종조론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학문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김영수는 무엇보다 보우 이전에 조계종이 엄존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또한 그가 중시했던 가지산문의 전통을 고려할 때, 보우보다는 도의가 오히려 종조 위상에 걸맞지 않느냐는 논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그는 결국 ‘後조계종’이라는 궁색한 논리까지 제시하고 나섰지만,33) 얼마 지나지 않아 조계종의 종조는 결국 도의로 확정되는 변화를 보이게 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보조 지눌이나 태고 보우는 조계종 종조가 될 수 없는 근본적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고려의 조계종은 이들 이전에 이미 종단으로 존립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먼저 다음의 자료를 살펴보도록 하겠다.34)

乾統 元年 辛巳에(1101년) 대각국사가 비로소 천태의 宏綱을 세웠으며, 우수한 학자 100명을 뽑아 봉은사에 있게 하며 천태종 경론 120권으로 고시를 보아 賢良 40여 인을 선발하였다. 국가 초기에 대행하였던 曹溪 ․ 華嚴 ․ 瑜伽와 더불어 軌範을 나란히 하였으니 세상에서 이를 일러 四大業이라 하였다

<선봉사대각국사비>에 실린 위의 내용은 종파 형성 시기라든가 조계종명의 기원을 밝히는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우선 이 자료를 통해 曹溪業 ․ 華嚴業 ․ 瑜伽業 등 3개 종파가 고려 초부터 불교계의 유력 종단으로 존재해 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35) 고려 초기의 종파불교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종파불교를 막연하게 5교양종, 또는 5교9산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고려초에는 ‘3대종파’가 있었으며, 천태종 개창 이후에는 ‘4대종파’가 고려 불교계를 주도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고 최근 학계에서는 대부분 이를 수용하고 있다.36)

9세기 말부터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선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조계종’으로 변화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승과고시의 시행 등에 따라 선종은 단일 종단으로서의 체제를 갖추는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종명을 조계종으로 확정하는 변화를 선택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나말여초기에 성립된 선문 조사의 대부분이 남종선을 계승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조계종이라는 종명은 이 시기 선종의 연원을 상징하는 의미로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계종 성립을 천태종 개창과 연관하여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의천의 천태종 개창을 계기로 선종 교단 내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같은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조계종이라는 종명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실제로 천태종 개창은 이 시기 선종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천태종은 개창 무렵 1,000여 명의 승려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명으로 천태종에 흡수된 승려(五門學徒) 700여 명과 직접 의천의 문하로 찾아온 승려(直投弟子) 300여 명 등 도합 1,000여 명에 달하는 승려로 인적 구성을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세력은 대부분 선종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왕명으로 흡수된 ‘오문학도’ 세력은 대부분 法眼宗 계통의 선승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직투자 300여 명은 ‘募集達摩九山門 高行釋流’라는(<敎雄묘지명>) 표현으로 보아, 모집 과정을 통해 스스로 의천 문하로 들어온 선승들을 말한다. 이들 직투제자는 의천 입적 이후 천태종 핵심세력으로 남게 된다. 천태종 창종의 인적 구성이 되었던 5문학도와 직투자는 ‘天台六法眷’, 즉 천태종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세력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같은 인식은 고려후기까지 ‘天台六山’ 등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이렇게 상당수의 선승들이 왕명에 의해, 또는 자발적으로 천태종에 소속되면서 이 시기 선종 세력은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37)

<운문사학일국사비>에는 “대각국사가 송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의 교의를 전해 왔으며, 아울러 천태교관을 배워 왔다. 철종 元祐 원년 丙寅에 돌아왔는데, 지자대사를 존숭하여 별도로 宗家를 세웠다. 이때에 藂林衲子 가운데 천태종으로 치우쳐 속한 자가 10에 6, 7이나 되었다. 師(학일)는 祖道가 쇠퇴하는 것을 슬퍼하면서 홀로 서겠다는 마음을 확고히 하였으며, 몸으로라도 그 임무를 삼고자 하였다. 대각국사가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끝내 그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8)는 내용이 있다. 천태종 개창 당시 선종 교단이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다.

선종 소속 승려들을 인적 기반으로 하여 출발하였던 고려 천태종은 세종 6년 종명을 상실할 때까지 조계종과 함께 선종의 승계를 지닌다. 즉, 고려 천태종은 중대사-삼중대사-선사-대선사로 이어지는 선종 교단의 승계를 지녔던 것이다. 이같은 점을 고려하면, 천태종 개창 이후 일반적인 선종이라는 명칭과 구분하기 위해 조계종으로 그 이름을 개명하였을 것이라는 일부의 설명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지만 발표자는 앞서 살펴보았던 <선봉사대각국사비>의 ‘國初’라는 표현을 더욱 중시하고 싶다. 고려의 조계종은 천태종 창종(1097) 이전에 이미 그 종명을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39)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불교에서 조계종은 고려 초, 또는 천태종 개창 직후 무렵 단일 종파로 성립되어 있었다. 비록 단편적인 자료이지만 조계종이라는 종명은 이후 <예천용문사중수기>라든가 <단속사대감국사비>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용문사중수기에 나오는 ‘乙巳年(1125) 曹溪選中格’이라는 표현은 1125년 조계종에서 실시하는 승선, 즉 승과고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는 표현으로 이해된다.40) 또한 대감국사비의 碑題에는 ‘高麗國 曹溪宗 崛山下 斷俗寺 大鑑國師之碑銘’이라는 표현이 있다. 비의 주인공 坦然은 1159년 입적하였고, 이 비는 1172년 세워졌다. 이 비제에 새겨진 ‘조계종’은 조계종 세 글자가 모두 표현된 최초의 자료라는 점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 자료를 근거로 이 시기에 처음 조계종이 설립되었다거나, 더 나아가 탄연이 조계종 창종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또는 자료에 대한 그릇된 해석으로 인해 조계종 성립 시기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는 무척 다양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9세기 말 경 성립된 선종은 늦어도 천태종 개창 시기를 전후한 시점에 조계종으로 그 종명이 바뀌었다. 이후 조계종은 천태종 등과 구분되는 선종 종파의 하나로 1424년까지 그 역사를 지속하였다.

조계종은 이처럼 비교적 뚜렷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보조종조론, 태고종조론 등이 제시되고 그를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역사인식 오류에 해당한다. 김영수는 이같은 점을 인식하고 1941년 설립된 조선불교조계종을 ‘후조계종’으로 생각하자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으나, 조계종을 표방하는 한 이것은 더욱 심한 논리적 오류에 빠져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통합종단 출범 이후에도 이재열, 이종익 등이 주도한 보조종조론은 건의서, 또는 종헌개정안의 형태로 여러 차례 종단 집행부에 제기된 적이 있다. 심지어 1969년 청담 스님이 종단에 제출한 <유신재건안>에서 보조종조론은 다시 등장하기도 하였다. ‘조선불교’, 혹은 ‘대한불교’라는 접두사가 붙었다고 해서 조계종사 자체를 왜곡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더욱이 조선불교조계종과 대한불교조계종은 종헌 종법을 통해 역사 속의 조계종을 계승한다는 취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므로, 과거 조계종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종단 존립의 전제 요건과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같은 측면에서 현 조계종단의 종조 인식, 즉 도의를 종조로 설정하고 있는 점은 비교적 적합한 역사인식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종조로서의 도의 위상에 관계된 문제는 다음 절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계속됩니다)
============================================================================
#각주

24) 《역주조선불교통사》 4책, 하편 1, pp.687-688

25) 금명 보정의 저술은 《한국불교전서》 12책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와 저술이 갖는 특성 등에 대해서는 김용태가 처음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하였다(김용태, <금명 보정의 부휴계 정통론과 조계종 제창>, 《한국문화》 37,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06).

26) 이종익은 《조선불교조계종중흥론》(보련각, 1976) 서문에서 “벌써 30여 년 전에 <조선불교진흥론>을 썼고 다음 <조선불교의 진로>를 썼으나 다 간행되지 못하고 8. 15를 맞았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이종익은 해방 직전 무렵부터 보조종조론을 주장하였던 것 같다.

27) 이재열은 1946년 《朝鮮佛敎史之硏究(第一)》(東溪文化硏揚社)를 간행하였는데, 이 책의 自序에서 “이 소책자는 거금 오년전에 치안방해(1942년 9월 3일)란 이유 하에 출판허가를 취소하였던 《曹溪宗源流及傳燈史之根本的硏究》, 《曹溪宗傳燈譜竝開宗敎旨》 2부를 개편한 것이다”는 사실을 밝혔다.
28) 이철교는 “이 때에 조계종 종정 방한암과 송광사 삼일선원 조실 이효봉, 조계강원 주실 임운양 등은 그의 연구를 격려하고 지지하여 주었으며, 안진호와 이능화는 직접 교열까지 보아주었다”고 하였다(이철교, <불화 이재열>, 《세속에 핀 연꽃》, 대한불교진흥원, 2003, p.328). 이재열의 보조종조론은 성격상 송광사 대중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29) <선종구산의 내력(1)-(6)>, 《매일신보》 1921. 10. 31-11. 6

30) 김영수, <조선불교종명에 대하야(1)>, 《매일신보》 1922. 4. 1

31) 방한암, <海東初祖에 對하야>, 《불교》 70, 1930. 4

32) 권상로는 ‘도의종조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古祖派의 신발견>(《불교》 新 31, 1941. 12)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자료가 도의-보우에 이르는 전법 계통이 담겨있는 新資料라고 주장하면서, 조계종 종조는 도의가 되어야한다는 견해를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가 《불교》지에 소개한 <□古祖派>라는 자료는 실물을 제시하지 못한채 자신이 필사한 내용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교계의 비판이 적지 않았다. 아직까지 권상로가 필사했다고 하는 원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33) <종조종명의 질의에 대하야>(《불교》 新 61, 1944. 6)에서 이같은 견해를 밝혔다. “今 태고사법에서 태고화상을 종조로 한다는 것은 현 조선불교태고법손인 칠천승려로 조직된 조계종의 종조라는 것이다....태고 이전의 조계종은 조계혜능조사 법손인 구산선파문도로 조직된 교단의 명칭이요, 태고 이후 금일의 조계종은 태고법손 칠천승려로 조직된 교단의 명칭이다. 이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태고사법 중에서 똑똑하고 분명하게 大字特書하기를 ‘조선불교조계종’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이 조선불교조계종이란 것은 역사상에 흔히 볼 수 있는 후백제 후고구려라는 것과 같은 ‘후조계종’이란 의미다....‘조선불교조계종’이란 것은 竪로는 태고 이전 구산법손으로 조합된 고려불교조계종이 아니라, 현 태고법손 칠천문도로 조직된 조선불교조계종이요 橫으로는 조계혜능대사의 법손인 임제, 조동 등 內地佛敎가 아니라 태고법손의 조선불교조계종이라고 對他簡別的으로 표시하는 종명이다.”

34) 乾統元年辛巳 大覺 始擧宏綱 抄學優者一百人 坐奉恩寺 以宗經論一百二十卷 試取賢良四十餘人 而與先國初 大行曹溪 華嚴 瑜伽 軌範齊等 世謂之四大業也
林 存 찬, <仁同僊鳳寺大覺國師碑>, 《교감역주역대고승비문》 고려편 3, p.187.

35) 여기서의 業이 곧 종파를 의미한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종파의 의미로 사용된 業의 용례는 태조 훈요10조(各業寺社)를 비롯해 상당 수 전한다. 고려 과거제도의 경우에서 보이는 것처럼 업은 전공이나 전문성을 나타내는 字意를 지니고 있었다.

36) 이 견해는 허흥식이 처음 제기한 이후 역사학계에서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상태이다.
허흥식, <고려전기 불교계와 천태종의 형성과정>, 《한국학보》 11, 1978, 일지사
-----,<한국불교의 종파형성에 대한 시론>,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3, 지식산업사(<종파의 기원 에 대한 시론>, 1986,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37) 김상영,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 《논문집》 8, 중앙승가대학교, 1999(《의천-한국의 사상가 10인》, 예문서원, 2002 재수록), pp.277-282 내용 참조.

38) 國師 西游於宋 傳華嚴義 兼學天台敎觀 以哲宗元祐元年丙寅回 尊崇智者 別立宗家 于時 藂林衲子 傾屬台宗者 十六七 師哀祖道凋落 介然孤立 以身任之 大覺 使人頻諭 而卒不受命……我肅王四年 宋紹聖王五年戊寅 大覺 於弘圓寺 置圓覺會 以師爲副講 師辭曰 禪講交濫 不敢當之
<淸道雲門寺圓應國師碑>, 《교감역주역대고승비문》 고려편 3, 같은 책, p.262
39) 11세기는 고려 종파불교 역사에서 유가종, 화엄종의 종파의식이 점차 강조되어가는 시기로 주목된다. 혜덕왕사 소현은 중국 법상종의 현장, 규기와 함께 해동6조의 상을 조성하여 유가종 제 사찰에 보급하였고 매년 7월 14일 유가종 승려들을 모아 미륵불에 예참하는 특별법회를 22년간(1075-1096)이나 개최하였다. 미륵신앙은 고려 유가종의 중심 신앙이었으므로 이러한 법회를 통해 유가종단의 신앙 고취와 종단 구성원들의 결속력 강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소현의 碑에는 ‘我宗’ ‘本宗’ ‘他宗’ 등의 표현이 자주 쓰였는데, 이러한 표현은 소현 이전의 유가종 고승비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의천 역시 화엄종을 ‘吾宗’ ‘本宗’으로 표현한 경우가 많으며, 1101년에는 홍원사에 9조당을 건립하여 이른바 ‘화엄9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소현과 의천 제자 元景王師 樂眞의 碑題는 각각 종명 앞에 大자를 덧붙여 ‘大瑜伽業’ ‘大華嚴業’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종파의식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며, 조계종 성립과 천태종 성립 등도 이같은 흐름 속에서 진행된 불교계의 변화 현상으로 생각된다.

40) 용문사중수비 원문은 한기문의 논문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예천 ‘중수용문사기’ 비문으로 본 고려중기 선종계의 동향-음기의 소개를 중심으로>, 《문화사학》 24, 한국문화사학회, 2005).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