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속간의 장벽이 너무 높다
승속간의 장벽이 너무 높다
  • 마성 스님
  • 승인 2012.04.16 10:59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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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마성 스님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소통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각 분야에서 제대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남북관계는 물론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 여당과 야당의 관계, 종교와 정치의 관계, 종교 상호 간의 관계, 노사 간의 관계가 제대로 소통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붓다는 ≪육방예경(六方禮經)≫에서 여섯 가지 인간관계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설한 바 있다. 이른바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父子關係],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師弟關係],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夫婦關係], 친구간의 관계[朋友關係], 주인과 종업원과의 관계[主從關係],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僧俗關係] 등이다.

봉암사 결사 이후 달라진 한국불교의 풍속도

그 중에서 승속(僧俗)의 관계에 한정하여 말하면, 승속 간에 높은 장벽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출가와 재가의 엄격한 신분 구분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승려중심의 불교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1947년 시작된 봉암사결사 이후부터 한국불교의 풍속도는 급격히 달라졌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가 출가자 중심의 불교로 바뀌게 된 것은 봉암사결사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승려에게 삼배의 예를 올리는 관습도 없었다. 그것을 강조한 분이 성철스님이다.

봉암사결사 이전에는 승려와 신도의 복식에도 별로 차이가 없었다. 한복과 승복은 별로 차이가 없다. 다만 승복은 먹물을 들여 회색이었다는 차이뿐이다. 옛 장삼은 선비들의 도포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다만 승려는 의식을 집전할 때 붉은 색의 홍가사(紅袈裟)를 수했기 때문에 구별되었을 뿐이다. 봉암사결사 이후 변한 불교의 풍속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승속 간에 너무 격식을 따지게 되었다. 사찰의 예절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신도들은 반드시 스님께 삼배를 올려야 하는 것으로 변해갔다. 그 때문에 거사들이 사찰에 오는 자체가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나이 많은 노보살에게 반말하는 것은 다반사고, 갓 머리 깎은 사미승이 자신의 부모보다 나이 많은 신도로부터 삼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승려의 위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승속의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었다. 봉암사결사 이후 지금까지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인한 승려의 신분을 향상시키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팔천민(八賤民) 가운데 하나였던 승려 신분을 당시에는 향상시킬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신도 위에 군림하는 위치에까지 오게 되었다. 부처님이 비판했던 바라문교의 사제 신분과 바를 바 없다.

승려 중심으로 변한 교단과 사찰

셋째는 불교교단과 사찰이 승려중심으로 변하게 되었다. 예전의 사찰은 사부대중의 공동체였다. 그 중심은 거사들이었다. 사찰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찰의 큰 불사는 많은 돈이 소요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설판재자가 거사들이었다. 여성 신도들의 푼돈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집안 어른들의 승낙 없이는 큰돈을 사찰에 시주할 수도 없었다. 곳간의 열쇠, 즉 경제권을 대부분 가장(家長)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부인들이 경제권을 쥐게 됨으로써 여성중심의 불교로 변해 갔다.

넷째는 사찰의 문턱이 점차 높아져 가고 있다. 예전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언제든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사찰이었다. 지금처럼 사찰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주인으로 생각하고 손님을 대하는 것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신도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직접 사찰의 모든 일을 처리했다. 이를테면 신도가 절에 와서 스스로 도량을 청소하고, 법당의 다기물을 갈고 마루를 닦고 청소하는 일 등 온갖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찰에서 월급을 받는 종무원들이 이러한 일들을 담당하고 있다. 신도는 일체 사찰의 업무에 관려할 수 없는 체제로 되어 있다. 주인과 고객의 관계로 변질된 것이다.

다섯째는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남성(거사)과 여성(보살)들의 신앙형태가 약간 달랐다.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복적인 신앙이었다. 그러나 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수행하는 거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학식 있는 거사들은 스님들과의 교류를 통해 학식을 넓히고, 불경(佛經)을 읽으면서 자신의 심신을 수련했다. 이처럼 훌륭한 전통과 풍속들이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출입금지 푯말 붙고 사찰 문턱 높아져

여섯째는 예전의 사찰은 기능이 다양했다. 사찰이 불교신앙의 귀의처이자 중심지였지만, 지역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이 절에서 행해졌다. 이를테면 절은 계모임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사찰에는 칠성계, 지장계 등이 있어서 지금의 상조회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사찰은 놀이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학생들의 소풍과 수학여행 장소는 거의 대부분 사찰이었다. 그때는 사찰에서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봄과 가을 사찰에는 나들이 나온 인파들의 풍물놀이로 왁자지껄했다. 사찰은 수행도량으로서의 차원뿐만 아니라 온갖 야유회 모임과 여가 활동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어느 때부터 사찰에 출입금지 푯말이 붙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으로 변해 갔다. 사찰의 문턱이 점차 높아져 갔던 것이다.

일곱째는 예전에 재가신자들이 접한 불교는 현학적이지 않았다. 차원 높은 불교의 철학책들은 극히 일부의 학승들이나 볼 수 있는 귀한 책들이었다. 당시는 책이 귀해 스님들도 접하기 어려웠다. 일반신자들이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독용송 경전들이 대부분이었다. 교리에 대한 지식은 일천하였고, 오직 경전을 독송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경전 독송 그 자체로 수행의 일과로 삼았다. 특히 경전 독송의 공덕을 언급한 천수경, 금강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이 주로 읽혔다. 그리고 중국에서 편찬된 위경(僞經)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를테면 팔양경, 부모은중경, 고왕경 등 친서민적인 경전들이 주로 암송되었다. 독송 그 자체로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전의 사찰 풍속 중에 불교의 바른 신행으로 개선된 것도 있지만, 승려의 권위를 너무 앞세우다보니 승속간의 격의 없던 예전의 친분관계가 무너져 버린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거사들이 사찰에 자주 드나들고 싶어도 삼배를 강요하는 분위기 때문에 방문횟수가 점차 줄어들고 사찰의 문턱은 더욱 높아만 갔다.

신도들로부터 삼배 받을 만큼 자격을 갖췄는가

나는 동료스님이나 재가신자들로부터 삼배를 받을 때가 가장 불편하다. 그들로부터 예배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최소한의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합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지나친 예의는 오히려 모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의 스님들을 보면 제대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스님일수록 굳이 삼배를 강요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신도들로부터 예배를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출가한 것이 무슨 벼슬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권위의식을 갖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과연 남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밥값을 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본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이처럼 승속 간에 장벽을 만든 책임이 일부의 재가신자들에게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으로 그 스님을 존경하지 않으면서 직접 대면하면 그 앞에서 삼배의 예를 올리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그러다가 돌아서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스님을 비난한다. 이러한 재가신자들의 이중적인 잣대와 태도로 인해 승단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승속 상호간에 불신의 벽이 더욱 높아져 간다. 불교교단은 사부대중(四部大衆: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상호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출가자와 재가지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다할 때 불교는 발전하게 될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마성 / 팔리문헌연구소장

팔리문헌연구소
http://www.rip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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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 2012-05-03 14:33:12
천백번 옳은 말이고 정답입니다. 사회에서 고립되고, 바닥생활을 하다가 머리 깍고 승복입으니 신도들이 절을하고 놀고먹으면서 돈이 생기니 싸가지는 온데간데 없고 보살들에게 반말하고 거들먹 거리고, 참 웃기지도 않는 집단입니다...도적질을 하는 패거리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글을 쓴 마성스님도 크게 다르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부디 승가를 개혁하고 정화를 해야하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불교가 망하기 전까지는

원불사 단현 2012-04-18 16:02:20
저는 어떤 스님이거나 삼배하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스님의 권위나 자부심이 땅에 떨어진 시대에 스님의 기를 살려드릴 수만 있다면 1000배를 왜 못하겠습니까?
다만 행이 따라주지 않으니 재가자의 진정한 삼배를 받기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 스님들이 한국불교의 계행이 습이 되어버린 후 재가자들은 존경을 거두어 버렸습니다.
교학이나 수행이 문제가 아니라 계행청정한 비구의 모습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_()_

소중한 님 2012-04-18 05:26:36
스님님께 삼배를 올리는 것은 그 개인에게 하는 의미보다 승가에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절을 한다는 것은 삼보를 존중하고 귀의 한다는 의미지 .... 현 시대에서 승려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과연 승가가 없는 불교가 존재 할까요...?

도둑 절 2012-04-16 18:32:51
삭발염의가 뭐 대단한거라고...
절을 할 것 같으면...
그 대단한 것들을 멕이 살리는 단월에게나 절해라?
중질을 오래했다고 절 안하면 안한다고 토를 다는 스님이 있으니 하는 말이지...

절 도둑 2012-04-16 16:55:56
고놈이 바로 절 도둑 놈이다. 성철 스님께서 삼천배를 해야 뵐 수 잇다는게 철스님 자신에게 삼천배를 강요하신거라 생각하는가? 나중엔 나무토막, 돌덩어리, 우상에 절하느냐고 글을 쓸 태고종스님이로고, 자고로 형식적인 절이란 것은 승려 개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제자라는 표식인 삭발 염의에 절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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