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에게서 복지를 배우다
토정에게서 복지를 배우다
  • 이기표 부산보현의집 원장
  • 승인 2011.02.1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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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표 원장의 세상이야기]

#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578년 어느 날, 충청도 아산현감에 부임한 토정(土亭) 이지함이 관내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길거리에 거적을 깔고 앉아 동냥을 하는 걸인들이 많은 것을 보고 아전에게 물었다.
 “이 고을은 땅이 비옥한데 어찌하여 걸인들이 이렇게 많은가?”
 “몇 년째 가뭄이 들어 소작인들에게는 먹을 양식이 돌아가지 않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관아에서는 어찌 구경만 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 걸인청(乞人廳)을 세우고 거지란 거지는 모두 잡아들여 그곳에 수용하게.”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데 저 많은 거지들을 무슨 수로 먹여 살릴 수 있단 말씀입니까? 거지소굴만 만들뿐이니 차라리 저들을 다른 고을로 내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아전들이 하나같이 만류하자 토정이 목청을 가다듬어 이렇게 꾸짖었다.
 “어허, 이런 고얀 사람들을 보았나!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 벼슬아치의 본분이 아니던가? 내가 걸인청을 세우려는 것은 저 헐벗은 걸인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보살피고 그들도 집과 땅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우려 함이다. 너희들은 저들을 재우고 먹일 건물이 없다느니 재물이 없다느니 핑계를 대지만, 세곡을 쌓아둔 창고가 있지 않느냐. 그 창고를 수리하여 방을 만들면 될 것이고, 세곡으로 한 해 동안만 먹여주면 자립할 방도가 마련될 것이다.”

 토정은 걸인청을 세우고 고을 안의 걸인들을 재우고 먹이며 일을 시켰다. 노동력이 있는 걸인들은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거나 배를 타고 고기를 잡게 했다. 부녀자들은 수공업에 종사하도록 하고, 노약자나 병자에게는 짚신을 삼거나 새끼를 꼬는 등의 쉬운 일을 시켰다.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을 내다 팔게 하여 자립할 수 있는 밑천을 삼게 했다. 노인에서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일하지 않고는 먹지도 않는다는 근로복지를 통해 걸인들로 하여금 새 삶을 열어가게 한 것이다. 토정의 걸인청은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복지시설이자 노숙자 자활센터였던 것이다.

 # 경제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오늘에도 많은 노숙자들이 구호단체에서 제공하는 무료급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일을 해서 먹고 살 방법을 찾지 않고 거리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심지어 노숙자쉼터에 입소하기를 권해도 거부하는 이들이 많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공짜중독증’ 때문이라고 한다. 공짜 밥과 공짜 잠자리에 익숙해지다 보면 일할 의욕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생활의 제약이 있기 마련인 보호시설의 단체생활마저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노숙자쉼터를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이 바로 입소자들의 ‘공짜중독증’을 치료해주는 일이다. 옛날에 토정선생이 했던 대로 모든 입소자들에게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있다. 그리고 노약자에게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공업 같은 단순한 일거리를 제공해주고, 젊은이들에게는 직업교육을 시킨 다음 건설 현장이나 중소기업 등에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또한 쉼터 직영의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여 택배사업 등에 종사하게 하고 있다. 물론 노동을 통해 얻어진 수익금은 각자의 자립기금으로 적립해 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는 돈을 모으면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인데, 그 눈물겨운 돈으로 주변의 독거노인가정을 도와주는 갸륵한 이들도 있다. 이쯤 되면 가장 건강한 사회인으로의 복귀인 것이다.

 # 보도를 보면 어지간히 살만한데도 가짜빈곤층 행세를 하며 기초생활수급비를 지원받다 적발된 사람이 18만 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중에는 수십억 대의 땅 부자가 매월 35만원의 기초수급비를 챙기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새어나간 복지예산이 한 해에만도 무려 3,200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 돈이면 거동조차 어려운 독거노인이나 장애인들을 안락하게 보살필 수 있는 액수다. 근근이 모은 자립기금으로 더욱 불행한 이웃을 돕는 노숙자도 있는데 그들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사회인가. 

 요즘 세간에서는 ‘무상복지’ 논쟁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살만한 사람까지 공짜지원을 받기 위해 거지행세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어느 노숙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나와 같이 노숙하던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그대로인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을 보면 아찔하다. 나도 그들처럼 공짜 밥에 매달려 있었다면 아직도 거지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공짜에 매몰되다 보면 결국 노력할 의욕을 상실한 채 무력증에 빠져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일찍이 토정선생도 그것을 염려하여 걸인들에게 일을 시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일자리복지정책을 폈던 것이다.

   
1956년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불교방송 부산사업소장, 진여원불교대학 학장을 거쳐 부산보현의집 원장을 맡고 있다. 부산노숙자쉼터 협의회 회장을 비롯해 독거노인을 위한 무료급식 등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Fact 포럼 대표, 한국전력공사 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제로에서 시작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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