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종사는 상식을 벗어난 악의적 간행서"
"태고종사는 상식을 벗어난 악의적 간행서"
  • 이혜조
  • 승인 2006.02.11 10:07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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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학연구소, 분석연구 보고서 통해 정면 반박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김광식박사가 작성한 <태고종사> 분석 연구 보고서는 태고종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한 글이다.

다음은 보고서에 언급된 태고종사의 문제점 분석을 요약한 것이다.

- 1941년 4월 23일 인가된 태고사법이 "태고원증국사의 법통을 상승한 종단임을 천양하기 위해 조선불교조계종태고사법이라 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 까"고 기재.(181면)
▲ 이 표현은 태고종이 강조하는 태고국사를 계승한 태고사법이 친일과 무관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

-교무원 집행부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교단의 계통을 케케묵은 보수세력으로 규탄하고 비방하면서 교단의 진보적인 혁신을 외쳤다. 그때의 성명은 자파의 주의나 노선을 표명하는 단순한 성명이 아니라 기존의 총무원을 불신하고 그 주도인물을 매도하고 훼욕하는 것이었다.(232면)
▲ 당시 불교혁신에는 선학원 비구승들이 적극 참여했는데 그 주장을 비하. 당시 혁신단체들은, 대처승은 교도로 자리매김하고 청정비구승 중심의 교단운영을 강조하였는바, 이를 제시하지 않고 주장을 훼욕차원으로 인식.

선학원 청정비구승을 '괴뢰'집단으로 폄하

- 중앙총무원과 맞섰던 김용당 장상봉 이부열 곽서순은 이북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김용담은 그때 선학원의 부이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선학원이 공산주의자들의 소굴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했다.(239면)
▲ 불교혁신에 가담한 승려, 선학원 계열 승려들이 통일운동차원에서 북한을 왕래하고 김구와 평양행 동참한 것은 사실이나 승려의 민족통일운동으로 볼 수 있음. 선학원이 공산주의자의 소굴이라고 지적한 것은 보수적인 교단책임자와 비구중심의 교단 개혁을 부인한 보수주의자들의 단정적 인심.

- 한 때 중단됐던 조계종이 1954년 만암종정에 의해 다시 이어진 것이다.(247면)
▲ 만암이 종정 재임시 조계종을 새롭게 창종한 것은 사실. 만암종정이 칭종하기 이전의 비구승들의 노력과 이승만의 유시가 발표된 직후에야 칭종한 것은 설명치 않음.

- 그러므로 오늘날의 조계종은 1941년에 세워졌다가 해방과 더불어 중단됐으나 1954년에 다시금 살려 놓은 원조계종을 강탈하여 오늘에 이르고.(274면)
▲ 현재의 조계종 법통을 완전 부인하는 지적. 조계종은 1962년 통합종단 이전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종단.

조계종 법통마저 완전 부인

- 깊은 사암에서 공부해야 할 수행승들이 사찰 운영과 원장 주지직의 명리욕에 빠져 도리어 자신들이 규탄 대상으로 삼아 축출했던 사판승의 길을 즐겨 택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251면)
▲ 정화운동의 이념 취지 긍정적 성과는 간과한 채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편파적인 역사 해석이고 조계종의 명예를 추락시킬려는 의도.

- 혁신단체들이 주축이 되어......총본산 태고사를 넘겨 달라고 요청.(252면)
▲ 혁신단체들이 별도의 교단을 만들어 기존 교단과 대응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태고사를 넘겨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사실적 근거는 없었다. 교단 혁신을 실행한 비구승을 포함한 혁신단체의 폭력성과 과격성을 강조하려는 의도.

- 만암이 해방공간 당시에도 환부역조를 지적하고 백양사로 돌아갔는 바, 그 책임을 혁신계열의 조선불교정통총본원이 등장, 교단과 혁신단체 간에 갈등에서 태고서를 내놓으라고 강요, 총본원을 좌익 단체로 고발하는 등의 소란에서 찾고 있다.(요약 254면)
▲ 만암의 주장은 교단의 명칭을 조선불교로 하고 종조도 내세우지 않는 것을 비판한 것. 이것이 어찌 혁신교단 책임인가? 해방직후 교단의 집행부를 담당한 대처승 계열의 책임을 애써 부인하는 자의적인 해석.

교단 혁신 세력에 대한 과격성 폭력성 강조

- 그러나 일제 사찰령 아래에서는 이판과 사판의 알력이나 선학원과 중앙기주 또는 30본산 주지들 간의 대립적 견제 관계나 교권 다툼은 전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255면)
▲ 이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여기에서 태고종사 집필자의 역사인식 오류와 목적 지향성의 의도가 강하게 나온다. 일제하의 불교, 즉 대처승들이 주도하였던 시절에는 전혀 문제점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비구승들이 애써 수행공간 부족이니. 수행풍토의 파탄이니 하는 주장 즉 불교정화의 타당성이 부재함을 강조하려 함에서 기인한다. 1929년 등장한 종헌체제가 무너진 원인이 본사 주지의 비협조 친일성 본산 대립이었음은 관련 논문에서 밝혀진 바와 같다. 당시 본사 주지들의 교권 다툼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어이가 없다.

- 수행승들이 중앙기구나 본사 주지들에 의해 수행도량을 방해받았다거나 도량이 없어서 방황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수행승들은 ......수행도량의 할애를 요구하였고 승풍 정화라는 구호까지 내걸고 드디어 막강한 세력으로 떠오르게 됐다.(256면)
▲ 억지 주장의 대표격이다. 총독부는 대처승을 장려, 일제 말기에 90%이상의 비구승려가 결혼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1926년 용성스님의 건백서를 보면 승려의 결혼으로 인한 승려풍토의 파탄은 명백하다. 대처승의 보편화는 사찰 재정을 두고 갈등을 유발했다. 수도 도량이 폐해진 것은 상식이다. 일제하 불교에서 수행풍토를 방해받지 않고, 수좌들이 도량이 없어서 방황하지 않았다면 해방이후 불교정화운동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태고종사 집필자의 논문인 <승가 본래의 역사성과 한국불교 교단정화운동의 사적의의>에서도 속화현상을 지적하며 교단 정화를 기대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과연 상식있는 학자의 양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썼던 논문을 뒤집는 서술

- 이와같이 겉으로는 조용하면서도 교단 자체의 정화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려는 그 때에.(257면)
▲ 자체 정화 움직임이 미약하고, 불투명하니까 비구승들이 분개하고 그 해결책을 위해 선학원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교단에 가서 항의한 것을 완전 부인하고 있다.

- 전국 산림에 산재해 있던 자칭 비구승(독신수행승)들은 대통령의 소위 유시이후 종권 탈취의 꿈을 실현시킬 기회를 놓치기 않기 위해 서울 안국동의 선학원을 거점으로 모여 들었다.
▲ 이는 정화운동의 완전 매도와 부인이다. 정화운동에 참여한 당사자들의 순수한 정화 이념과 취지를 매도한 그 자체이다.

- 그리하여 태고사를 점거하고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궐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럴 즈음에 "일대 궐기해서 애국심을 표명할 것"이라는 지상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어찌 그 기회를 놓치겠는가.(161면)
▲ 정화운동의 순수성 비화, 정화운동이 이승만의 유시에만 의존하여 진행되었음을 강조하여 정화운동이 관제 데모임을 강조.

- 몰지각한 극히 일부 소수의 학자들이 고려 말기에 이미 법통이 단절된 불일 보조국사 지눌을 그대로 믿고 종권을 쟁탈하려는 자칭 비구승의 일부 지도층이 보조종조설을 내세우고 나섰다.(262면)
▲ 정화운동의 주역들을 자칭 비구승으로 매도, 부정시.

- 그러나 종권 탈취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소위 비구파 대표들에게는 종권이양이라는 일방적이면서도 강경한 요구 조건 외에는 문교부의 어떤 조정도 소용이 없었으므로.(268면)
▲ 정화주역을 강렬하게 비판을 하는 선을 벗어나 종권 탈취범으로 간주.

정화주역을 종권 탈취범으로 간주

- 종헌개정 전문 (사찰정화, 승풍규정을 당연시/수행승에게 사찰의 주권을 전부 인양/교화승은 일제히 퇴진하여 삼보호지와 수행승 외호, 사찰 유지, 재정관리, 민중교화 등에 진력한다고 하면서/이승만 박사가 추진하는 불교전통에 부응하겠다고.
- 문교부 장관에게 보낸 공문(이대통령의 담화를 받들어 별지와 같은 대책을 결의하고)(270~271면)
▲ 대처승측 교단에서도 정화 초기 불교정화를 당연시 했으며 이승만의 유시와 정책에 부응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음.

- 승단은 화합의 단체요 불교는 자비 실천의 가르침이며 자리이타의 지혜 종교이다. 그러한 불법을 구현하려는 비구가 또는 수행자가 스스로 비구승 수행승단이라 일컬으면서 종권탈취를 위해 폭력을 위둘러 싸운다면 어떻게 변명하여도 궤변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아무리 합리화 시켜도 불조를 욕되게 하는 큰 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정화운동을 종권 탈취 차원으로 강변.

- 소위 비구종단의 종권 탈취에 가장 골로가 컸던 그네의 총무원자 이청담을 해충 벌레 극히 우매 유치한 자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361면)
▲ 근거자료는 당시 전국신도회에서 청담스님의 상좌로 종단 내부의 일에 강한 비판을 받았던 문현구(문종)에 대한 강한 비판의 성명서이다. 문현구는 청담스님을 배경으로 종단의 일에 좋지 못한 일을 많이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해충 버러지라는 표현은 문현구에 대한 은연중의 풍자이지 청담스님에 대한 지칭을 아니었다.

청담스님이 해충 벌레? 인신공격 도넘어

- 조계사의 소위 비구승들은 처음 시작부터 폭력으로 태고사를 강점하였고 불법 점거라 하여 불리하게 되었을 때 단식하고 농성하고 순교한다고 떠들며......정화라는 미명아래 먼저 폭력으로 태고사를 점거하고 또 폭력적 수법으로 종권을 탈취하였으며, 폭력으로 그 자리를 지켜 왔다.(377면)
▲ 정화운동의 긍정적인 산물 등 일체를 부정하며 매도하는 인식의 극단적인 표출

- 그날 종회에서는 선학원측 괴뢰 종단의 구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화동 3대원칙을 철회할 것을 결의하였다.(395면)
▲ 괴뢰라는 표현은 과거 남한에서 이북의 체제를 부인할 때 쓴 표현. 괴뢰는 공산당 공산주의하는 뜻이 있다.

- 전국 사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찰 수복 사태는 단순한 불교분쟁 현상이 아니고, 1954년 11월5일 이전의 원상회복을 위한 주권행사 임을 통찰하여 줄 것을 쵸청하는 내용이었다......절을 빼앗겼던 전 주지측의 원상회복을 위한 주권행사임을 환기시켜 주었다고 할 수 있다.(398면)
▲ 자기들의 폭력은 정당한 주권행사로 간주했다. 불균형적 인식의 단면이다.

- 하동산 : 재물로 전법스님을 떼고 붙인 것, 파계 생자한 것. 이청담 : 파계생녀한 것. 따님 비구니와 소OO비구사이에 난행, 포태까지 하였다는 것.(403~444)
▲ 당시 성명서 전체를 제시한 것은 종단사 역사서에 제시하기 어려운 내용들. 분명한 것은 하동산 이청담스님은 대처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실은 대처승이란 말은 우리 불교역사상에는 없는 용어이며, 절대 권력자 이승만의 유시에 편승한 소위 가장 비구들이 종단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야 대통령과 일반이 혐오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비속어로 선택하여 썼던 호칭이었다.(445면)
▲ 일제시대에도 대처승이라는 말이 있었다. 대처승이라는 말이 보편화됐기에 사용한 것이다.

- 만행 한용운도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지만 아무도 그를 대처승이라 부르지 않았으며.(446면)
▲ 만해 한용운은 결혼한 직후 입산하여 승려가 됐으나 다시 결혼을 한 것은 1932. 그는 재혼후 심우장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생활했다. 즉 그는 사찰에서 생활하지 않았다. 그는 승복을 벗고 한복과 양복을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한용운선생이라 불렀다.

최근까지도 조계종은 폭력배 편싸움 연상케 해

- 참선 닦는 선사들은  마음의 집착마저도 던져버려야 하는데 어찌 물욕을 세속 사람보다도 더한다 말인가. 그들의 명리욕이 속인들보다도 못지 않다는 증거로는 싸울 대상도 없는 소위 조계종단 비구승가 내의 대중들끼리 명리욕 싸움의 폐풍이 전승되어 최근까지도 총무원장 자리 다툼, 수입 좋은 절 차지 사움 등 권좌 쟁탈전으로 폭력배들의 편싸움을 연상케 하는 유혈난투극 연출 사실을 들 수 있다.
▲ 조계종단에 대한 감정적인 매도의 극치다. 종단 스스로도 반성해야 함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주변 종단의 종단사에서 단정적으로 종단에 대한 폄하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집필자의 학자적 양심이 있는가 의심케하는 대목이다.

- 조계종을 창립한 이래 단일종단 하나의 법통으로 내려 왔으나 태고사를 강정함 무리들이 조계사로 이름을 바꾸고부터 종단은 분쟁으로 평온을 잃었고 그로부터 하나의 종단이었던 우리 불교계는 갈래갈래 찢겨 120여개 조각이 났으므로, 정통파 비구승단을 자처했던 그들이 결과적으로는 종단 분열의 주범이 된 것이라 자비와 화합을 체현하는 청정비구는 아니었던 듯하다고 하겠다.
▲ 원불교는 일제시대 이미 독자적인 불교활동을 했다. 지금이라도 원불교 천태종 진각종 등에 이를 확인한다면 그들 종단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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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2006-03-15 23:26:37
만해마을 만든 이도 대처승이거나 대처승 친구거나 그런가?
대처승이라고 죽어라 떠드는 이들 조사하면 다 나온다고 누가 그러던데...?
개 안풀어도 나온다고,,,,?

하하 2006-02-13 09:17:35
학자가 몇년 동안 자료 조사해 쓴 역사서를 몇 시간에 이렇게 분석하고 써 댈 수 있다니 대단하구먼....학자는 학문적 글을 통해 제대로 바로잡아야지..예절이 바르지 않으면 내용이 맞거나...당시의 사실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 지적해야지...저술한 이가 태고종의 입맛대로 쓰는 이였던가? 그런 것 아닌 지는 김 교수 등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ㅇㅇ 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할 수 있나?

비릿 2006-02-11 21:41:47
원래는 나무나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는 뜻이다. 괴뢰사(傀儡師)는 인형을 부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뒤에서 교묘하게 사람을 조종하는 자라는 뜻도 된다. 또 괴뢰정권이라고 하면 다른 나라에 의해 조종받는 정권을 가리킨다. 괴뢰가 북한이라는 뜻이라는 말 조계종 교육원 통해 처음 알았다.

하하 2006-02-11 21:39:14
백용성은 취처금지 해달라고 일제에 건의서 넣고,만해는 취처하게 하라고 중추원에 건백서 넣고 그랬지요. 일본에 건의한 것이나,정부에 건의한 것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봅시다.

쯧쯧.. 2006-02-11 21:37:17
이런 식으로 감정적인 대응하는 것은 큰종단답지 않지요. 옛날 태고종에서 세미나 한다니까...곳곳에 청탁 넣어 무산시킨 사례가 갑자기 생각나네. 정확하게 사료 들이대서 분석해야지..지금 자기 입장에서 그냥 평가하는 것은 전혀 객관적이지 못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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